인터넷 여기저기를 다니다보니 참 많은 사람들이 그 분의 죽음을 애도합니다

선비는 죽음으로서 말한다고 하죠. 진짜 선비인지 아니면 신분만 선비인지는 자기가 말한 것을 죽음앞에서도 얼마나 당당할 수 있느냐고 한 것이죠.

그런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너무나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아끼고 사랑했는지를 말해줍니다. 어떨때는 집값이 떨어진다고 주식떨어진다고 지지율이 떨어지고 지방선거에 패배하기도 해서 많은 정치인과 국민들이 등을 돌린 듯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수많은 국민들이 그를 아끼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기독교 일각에서는좋은 말하다 끝에 자살이어서 혹은 부패한 대통령이어서, 무책임한 마지막이라고 말합니다. 덕분에 앞의 덕담과 존경은 다 거짓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종교적 이유로(자살, 비기독교인) 이야기하지만 사실 자세히 읽어보면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이유가 강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일반적으로 불신자였던 사람에게도 추모예배나 장례를 행하기도 합니다. 이 점은 캐톨릭과 틀린 점인데.. 실제로 캐톨릭에서 얼마나 철저히 원리를 지키는지 모르지만 캐톨릭은 영세받지 않은 사람은 결혼도 장례도 해주지 않습니다. 개신교쪽에서는 이 점에서는 조금 열려있죠. 이유는? 그 사람의 구원은 모르기 때문입니다. 믿은 것 같았어도 정작 그 속은 모르는 것이고 안믿은 사람같았어도 구원여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예배는 죽은 이를 위한게 아니라 산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점이 결정적이죠. 살아서 애통해하고 비탄에 잠긴 사람들을 위로하고 온 교회가 함께 아파하는 것이 예배의 목적이기에 개신교는 일반적으로 행해집니다.

노무현대통령의 죽음은 해당이 될까요 안될까요? 저는 신학적 논쟁은 불필요하다고 봅니다. 비록 캐톨릭에서는 추기경이 절대 불가라고 했지만 개신교쪽에서는 일각은 반대 하지만 다른 쪽은 추모예배와 추도식을 행했습니다. 덕분에 개신교의 다양성과 갈등양상은 더욱 드러났습니다.

 기독교안에서의 갈등양상은 특이하게 신학적 차이가 아닙니다. 세대갈등이라고 보여집니다.

나이드신 기독교인들은 많은 분들이 월남하신 분들이 많죠. 그리고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았습니다. 지금처럼 사회주의나 자본주의를 선택적으로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 한쪽을 이해이전에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이었죠. 덕분에 어르신 세대는 노무현 등의 중도조차도 좌빨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젊은 기독교 세대는 또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안에서 보이는 보이지 않는 갈등이 계속 벌어집니다. 특히 나이드신 목사님이 정치이야기를 할때마다 젊은층은 얼마나 실망하는지 모릅니다. 정치가 진취적이면 불신자이거나 자유신학이라고 밀어붙이는 통에 자신의 정체성이 분명히 순수한 기독교인이 맞음에도 순수한 신앙안에서는 오직 보수우파,친미만이 가능한 것인라는 의문을 갖고 진보신학이나 비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은 적어도 반세대는 더 가야 어떤 결론에 이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여간

기독교인들 대부분도 얼마나 그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지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이를 바라보는 또 다른 외부의 시각입니다. 안티기독교라고 부르는 사람들인데. 사실 이 부분이 애매합니다.심정적 안티부터 모든 세세껀껀안티까지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안티의 존재는 꺼끄러울수있지만 교회가 교회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선지자적 파숫꾼의 목소리일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긍정적입니다. 하지만 이번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글들을 보면 종종 아무 생각없는 글들을 발견합니다.

아주 단순화시켜서 노무현 대통령을 죽인 세력은 이명박이고 이명박은 소망교회를 업은 기독교 장로이고 모든 책임은 기독교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자본세력과 수구언론세력과 때마다 부화뇌동하는 검경, 학계 등은 어디로가고 왜 항상 모든 결론이 기독교로 이어지는지 이해하기 힘듭니다. 어떤 사람이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이명박을 비난한 글을 썼습니다. 그러나 밑에 달린 댓글이 뭐냐면은 전도사 개독이기에 이 글은 무효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간단합니다.

노무현 전대통령의 죽음이 기독교책임이라는 듯이 써있는 글들을 봅니다. 참 무책임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전부 비기독교인이었습니까? 고노무현 대통령을 위한 추모예배등도 보았고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글들을 수없이 쓰고 있습니다.수백만 아니 수천만의 추모인들속에 기독교인들도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실재로 제 주변 기독교인들 상당수는 작금의 사태를 너무나 안타까워하지요.

또 이명박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죄다 기독교이라고 보십니까?

그 사람이 장로라는 것이 정말 기독교인임을 뜻하는 지는 저는 의심합니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도 의심스럽구요. 부시와 비슷한 방법인데 보수적 종교성을 내세움으로서 표끌기 좋고 종교적 친화성을 내세울수도 있으니까요. 실재로 기독교인들은 종교를 보고 뽑아줄만큼 단순하지 않습니다. 기독당이라고 아실지 모르겠네요. 그런 당이 몇번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지율 엄청 낮았습니다. 왜 목사 장로들이 가득한 그 당을 안 밀었을까요?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종교적 친화성만 가지고 투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대통령과 기독교를 연결짓는 이유가 뉴라이트 등의 사람들때문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재 그 숫자가 얼마라고 생각하십니까? 저 역시 제가 다니던 교회 목사님의 정치적 의견과는 상반되었습니다. 종교인이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때문에 신앙하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이 장로라고 내세울지 모르지만 그건 봉사하라고 준 직분이지 표끌라고 내세운 건 아니지요. 덕분에 기독교 이미지만 많이 나빠지고 있지만요.

기독교에 유감많으신 분 계신 것 같지만  아무데나 기독교를 일반화 시키는 것은 근대주의적 발상입니다. 버지니아 텍 살인사건때 그 사건주범이 코리안이라고 해서 모든 코리안은 학교명성에 눈멀고 자식교육 다 못하는 못난이, 사회부적응자라고 말할 수는 없죠. 노무현 지지자는 다 좌빨이고 노사모이고 젊은놈들이고 앞뒤구별도 못하는 놈들이고 빨갱이고 북한 갖다 버려야할 놈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나 이명박 지지자는 다 꼴통보수이고 기독교인이고 늙은이들이고 친미파 매국노라고 말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건전한 신앙생활처럼 건전한 안티이성도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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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ew Univ. NJ 의 추모예배에서 읽어진 추모사입니다.



당신의
죽음을 두고 어떤 분이(Id:워렌백작) 이렇게 말했습니다. “서울에 의한 부산 타살! 서울대에 의한 상고 타살! 부자에 의한 빈자 타살! 악에 의한 타살! 대기업에 의한 포장마차 타살! 개떼의 인간 타살! 맘몬의 야훼 타살! 친청러미일의 민족주의 타살! 몰상식의 상식 타살! 압제의 해방 타살! 돈의 타살! 어둠의 밝음 타살! 자본의 노동 타살! 도시의 촌락 타살! 주류의 비주류 타살! 도곡동의 구룡마을 타살! 있는자의 없는자 타살! 잿빛돌의 푸른물 타살! 강대의 약소 타살! 조단위의 억단위 타살! 5급수의 1급수 타살! 황소개구리의 맹꽁이 타살! 다수자의 소수자 타살!”

 

하나님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의 자살은 내몰린 자살 타살일지도 모릅니다.

가족을 압박하는 것처럼 좋은 방법도 없다 말은 해결사의 말도, 빚쟁이 추심업자의 말도 아닙니다. 법을 지키고 국민을 지킨다는 우리나라 현검찰총장의 말입니다. 판결전까지 무죄추정의 원리등은 한국에서는 책에만 존재하는 이야기인가 봅니다. 아방궁에 산다고 몰아대던 언론과 항상 다투면서도 이런 일에는 합심하는 검경이 가족을 친우들을 희롱하고 몰아감으로 내몰린 자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살한 사람은 교회에서 관심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추모예배를 하느냐고 합니다. 그런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자발적 자살같은 타살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가면 죽을 것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셨죠. 밤이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시면서 피하셨음에도 사역 마지막에는 스스로 몸을 드러내시고 죽이려고 벼르는 악마의 입에 머리를 들이미셨습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 허리띠의 주인이 이렇게 매여서 끌려갈 이라는 사도행전 21 아가보의 예언을 들은 성도와 친우들이 말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음을 향해 갑니다. 다른 때에는 성벽을 바구니를 이용하면서까지 도망갔으면서 이제는 알면서도 죽으러 갑니다. 스스로 죽으러 가는 순교는 자살일까요? 타살일까요?

 

하나님!

저는 외국친구들에게 한국은 예수믿고 복받은 나라라고 항상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부모님 세대의 고생과 은덕때문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항상 이야기하시던 못먹고 힘들게 살던 시대를 이제는 옛날 이야기처럼 듣고, 이제는 많은 유학생이 나와서 공부하고, 마주치는 관광객중 한국인들을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고 말입니다. 한국은 항상 공사중공화국이지만 그래도 그것은 성장중이기에 생겨난 성장통이고 정치가 아직도 주먹으로 치고 받아야 하는 정치이지만 그래도 성숙중이라고 믿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과 연이어 노무현 당신이 대통령이 되었을때에는 너무나 국민들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수많은 데모와 죽음을 거치더니 이렇게 성숙하고 성장했구나라구요.

 

하지만 당신의 죽음은 자랑스러움을 일거에 쓸어냅니다. 허탈합니다.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광주에서 죽였던 사람들은 살고 있고 조단위로 해먹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떵떵거립니다. 독한 사람들이지요. 온국민이 손가락질해도 삽니다. 얼굴색도 변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는 착한 사람은, 약한 사람은, 순수한 사람은 살수 없는 건가요? 매연이 가득한 서울처럼 지금의 한국은, 양심적인 사람은, 뜻이 있는 사람은 견디지 못하게 합니다, 숨을 쉬지 못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갔습니다. 좋은 노래하던 김광석씨도 가고, 우리 세대의 연인 최진실씨도 갔습니다. 탤렌트의 꿈을 키우던 장자연씨도 권력과 자본의 성상납에 못이겨 분노를 토하며 갔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서 몸밖에 없었던 사람들도 몸에 불을 지르고 갔습니다. 더군다나 소망을 보여줬던 당신마저 갔습니다. 힘이 없는 사람들은 가고 힘이 있었던 당신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갔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할까요? 그냥 나라를 포기해야하나요? 더러운 나라라고 앉아서 욕만해야할까요? 작은 촛불을 피우며 대화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전경은 방패로 찍으며 이걸 대화라고 말합니다. 일국의 대통령이 서거했는데 닭장차로 둘러싸고 바람안불어서 좋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소망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명박산성이라는 기상천외한 성을 쌓고 자신들만의 나라를 만듭니다. 대화라는 피가 통하질 않습니다. 마비된 몸같습니다. 우리는 누구에게 호소하나요? 어디에 우리의 한을 풀고 이야기합니까?

 

먼저 하나님 당신에게 구합니다.

시편기자가 말하듯이 하나님이여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소서. 돈도 권력도 복수할 힘도 없는 우리는 원수를 쳐다만 봐야합니다. 하나님외에는 토로할 곳조차 없습니다. 들어줄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억울함과 분노를 들어주소서. 억울하게 목숨을 포기할 밖에 없는 사람들을 도와주소서.”

 

하나님 그렇지만 마냥 신원하는 기도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우리 역시 핏값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라크 전쟁을 비판하지만 억울한 위에서 조절되는 기름값의 혜택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이메가바이트 대통령이 혹시나 베풀어 줄지도 모를 부동산과 풍요의 혜택과 떡고물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없어서 마지막 방법마저 없어서 죽음을 택했던 그런 사람들에게서 고개돌리고, 먹고 일에 바쁜 우리를 용서하소서. 집값 떨어졌다고 증시떨어진다고 호들갑 떨며 우리의 친구였던 사람에게서 등을 돌렸던 비겁한 우리들을 용서하소서. 양심과 고통에 겨워 홀로 부엉이 바위위에서 발을 나락으로 딛어야 했던 이의 말에, 또한 그와 같은 너무나 낮은 사람들의 호소에 살아있을 귀기울이기 보다 죽어서야 귀기울이고 이마저도 제대로 듣지 못하는 비겁한 우리를 용서하소서.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닥친 북한의 형제자매를 위해서 배고프게 기도하기 보다 남는 음식이 있어도 버리면 버렸지 나누지 못하는 우리의 기름진 배를 용서하소서. 당신에게 하도 복만 구해서 이제는 먹고 살만해져서인지 이제는 민족의 희망이라기 보다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는 우리를 용서하소서. 인생의 무게에 눌려 죽음으로 나아간 사람을 두고 기억하고 미안해하기 보다 먼저 자살한 무능한 사람이라고 자격도 없는 지도자라고 판단부터 내리고 무슨 추모예배냐고 주님의 자비와 연민을 잃어버린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우리를 용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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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군사정권과 유산때문에 이념논쟁과 갈등이 크던 시절에 정부는 항상 자신들의 목소리에 권위를 실어줄 소리와 정당성에 관심이 많았다. 이를위해 앞장선 사람들중에 신문기자가 있다. 그중 조중동 등이 즐겨 먹던 한가지 유치한 방법이 있다. 그게 외국소스를 이용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신문에서 먼저 김대중씨는 민주투사가 아니라 불법시위를 주도하고 미국이익에도 반하는 빨갱이이고 또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기사를 실는다. 그러면 외국기자는 기사를 바탕으로 한국에서는 김대중씨를 민주투사보다는 빨갱이로 보는 시각도 있다고 하더라 김대중씨에 대한 한국의견들을 싣고 소개한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외국기사를 바탕으로 외국유수의 신문에서도 김대중씨를 빨갱이로 보고 있다라는 기사로 싣는 것이다. 순간 외국의 권위있는 신문과 기자도 아는 빨갱이라는 사실을 아는 한국은 민주투사라고 하느냐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지금도 쓰인다.

 

2009 뉴시스아이즈 6 1일자 기사중에 이런 기사가 있다. ( 기사와 기자가 아주 심각한 문제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글이기에 골랐다. 이처럼 기사이지만 잘쓴 글에 비해 판단을 흐리고 이미지만 남기는 이름과 권위빌려오기 방법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동안 많은 기사들이 이런 방법들을 쓰고 있었다. 다만 오늘은 써야 하겠기에 글을 골랐다.)

 

[뉴시스아이즈]"예수는 부활하지 않았다" 주장에 기독교계 발칵

 

읽을 기사를 찾는 눈에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그래서 기사를 한번 살펴봤는데먼저 한숨이 나온다.

나는 종교를 무조건 옹호하지 않는다. 비판적으로 보고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일각의 이런 식의 기사와 기자들의 생각은 도대체 어디서 기인하는지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몇가지 안타까운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기사가 두가지 점에서 낚시이다.

하나는 기독교계 발칵이다. 미국 어디 소식을 듣고 발칵이라고 하는지 소스를 들어보고 싶다. 어느 교단의 어떤 교회들이 발칵했는가? 이건 완전 소설이다. 지레짐작이다. 바트박사가 유명한 이지만 그와 같은 글과 책을 쓰는 사람은 부지기수이다. 팔릴만한 책들은 관심을 끄니까 팔린다. 점잖케 쓰는 책들 출판사부터가 싫어한다. 그래서 학문적인 , 정통적인 책들이 안팔린다. 다빈치 코드만 해도 그렇다. 저자가 책을 소설책이라고 분명히 표지부터 해놨건만 사람들은 책속의 이야기들을 통해 의심한다. 다빈치 코드는 뭔가 새로운 놀라운 사실들을 밝혔다고 생각한다. 소설이라고 말해도 실재 역사라고 읽는다. 소설과 추측은 어디까지이고 사실은 어디까지일까? 바트박사의 책이 팔리니 벌써 2-3월에만 세권의 책을 냈다. 관심을 끌고는 있지만 어디서 발칵일까? 종교계의 소식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바트박사 이야기조차 기사덕택에 알았다.

 

하나는 서론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기사는 바트박사 CNN이라는 이름뒤에서 권위를 빌려쓰고 있다. 기자는 바트박사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기자는 글에서 “… 모두 원래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관한 어떤 것에도 근거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고 CNN 등이 보도했다라고 하며 CNN 기사를 그대로 인용하고 있지만 사실 권위를 이용해서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바트박사의 이야기가 아주 놀라운 이야기이고 미국 유수의 방송에서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주장이라는 것을 내세운다. 그의 주장은 미국학계에 교회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책이고 한국학계 일반인도 이제는 알아야 사실이라고 암시한다. 기자는 그의 주장이 아주 권위있고 미국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책처럼 이야기하지만 듀크대 학장이었던 윌리암 윌리몬의 이야기처럼 그의 이야기는 모두 이미 남들이 하고 있는 이야기의 재판이다. 윌리몬은 그의 책에 대해 말하길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자신혼자 영웅처럼 순교자처럼 주장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그의 기대와는 다르게 그의 주장들은 신학교 1학년때 한번씩은 듣게 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윌리암 윌리몬의 주장을 좀더 들어보면-사실 기자는 윌리몬 박사를 인용하지만 실재로는 관심없는 하다. 그는 교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 인정하는 대학자중 하나이다. 그는 바트 박사의 책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하나님에 대해서라기 보다는 자기에 대해서 쓰고 있다 지적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쓰고 싶은 책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로 가득한 책이라는 것이다.

다시 기자의 낚시질로 돌아와서 시엔엔의 이름과 윌리암 윌리몬이라는 교회비숍의 이름을 들면서 미국에서는 사실과 이를 눈가리고 아웅하는 교계의 격한 반응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름의 권위뒤에서 그는 사실관계를 흐리고 자기주장과 바트박사의 주장의 거리차이도 덮어버리고 만다. 더군다나 기사를 읽는 많은 이들의 눈도 흐리게 했다. 바트 박사에 대한 객관적인 소개인가 아니면 종교를 역사적 사실을 감추고 사기로 가득한 단체라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가? 미국사회 교계의 반응인가?

 

기자는 나를 낚았다. 성공적이었다. 제목이 눈에 띄였고 읽을 없게 낚았다. 기자는 원래 사람 낚는 어부들이다. 얼마나 조회수가 올라가느냐가 중요한 김용옥씨 말로 하면 하루살이같은 인생이니까 말이다. 기사 한번 쓰면 그만이다. 아무도 어제의 기사에 관심없고 그제의 기사는 관심 없다. 지금의 조회수가 문제인거다. 사실성 그것도 관심없다. 얼마나 눈을 끄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실 기자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바트 박사를 언급하며 말하고 있는거다. 외국학계가 어떻게 실재로 반응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기사는 소개하기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안티종교인들에게 가벼운 소스를 제공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진지하게 생각할 소스는 주고 있지 않다. 윌리암 윌리몬이 이름을 기자는알라바마의 비숍이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기전 그의 위치가 사실은 나가는 듀크대학 학장이었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는다. 학문적 양심적 고백한 학자의 의견에 대해 지위만 높고 자기 위치지키기에 바쁜 종교인이 불안해하며 말하는 듯한 대립을 주려한다. 바트박사가 진지한 학자라면 윌리몬 박사 역시 진지한 사람이다.

기자는 사실관계를 밝히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소개를 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종교계가 아직도 감추고 드러날까 두려워하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우리도 미국사회 학계에서는 저런 지식이 상식인데 우리만 속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지 정확해야한다. 소개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름뒤에서 말하는 자기주장인지 말이다. ‘발칵이라는 애매한 추측이나 ‘CNN, 비숍 윌리몬이라는 이름뒤의 사실혼동은 없어야할 내용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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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을 생각할때마다 항상 등장하는 것은 처음, 이전이라는 이상이다.

자연주의자들은 문명'이전'의 자연적 삶을 말하고 도가에서는 인위'이전'의 무위적 삶을 말하고 선불교는 분별지라는 무지'이전'의 이미 부처인 자아를 이야기한다. 어딘가에 있는 열반을 찾아가는게 아니라 이미 여기에 있는 자기를 버림으로서 본래 부처인 자기에게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교회개혁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초대'교회의 영성, '초대'교인들을 말하면서 초기 처음의 신앙과 교회로 회귀하려한다. 기독교의 회개역시 '돌아'간다는 것이고 탕자도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신앙은 돌아가는 것이다. 본래 자신이 피조물임을 깨닫고 본래적 자기로 회귀한다는 것이다.  '회귀'하면 니체를 빼놓을 수는 없을거다. 기독교문명으로 망가진 지금을 넘어서서 다시 처음으로 회귀하라는 주장이다.

정치도 자꾸 돌아가려 한다. 보수는 박정희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때'가 좋았다는 소리를 자꾸한다. 그럼 진보는? 진보 역시 돌아가려한다. 대학교 운동권시절을 그리워한다든지 80년대 90년대 초의 치열했던 젊음을 지금의 젊은이들과 비교하며 그리워한다.

 

'처음'은 항상 이상적이다. 그리고 이상화된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했을때에도 사막에서의 자유인보다 채찍맞던 노예시절을 그리워한다. 처음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어느새 배고프고 채찍맞던 시절을 잊고 오직 달콤함만을 기억한다. 심지어 한국사의 단군이야기도 사실적 역사적 연구보다는 정치에서 간절히 필요로 하는 이야기이다.

처음이 없으면 지금도 없기때문이다.”


처음은 항상 이렇게 오역되고 오해되고 이상화되면서 잊혀질 위험이 있다. 쓴맛은 사라지고 단맛만 남을 위험이다. 데리다말로 하면 해체의 위험성이다. 이것을 괴물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번 손탄 '역사, 처음'은 점점 이상한 모습으로 등장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동시에 그때문에 우리는 책임성과 윤리성을 가질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이 이야기는 다음 번에). 하여간 처음은 오해되고 이상화되고 예쁜 화장품으로 꾸며질 있다. 그래서 위험하고 그래서 위대하기도 하다.

 

이덕주 교수의 한국교회 처음이야기 이러한 우려와 괴물을 엑소시스하면서도 감동적이고 아픈 처음의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좋은 책이다.

먼저 책의 장점은 재미있다. 책은 재미있어야 한다. 작가 혼자 좋아서 어려운 책은 사람들에게 말못하게(?) 하는 경외감을 줄지는 모르지만 혼자만의 쇼일뿐 이다.


둘째는 역사와 한국의 교회사의 유사성을 발견하는 눈이다. 1902 하와이 이민단이 출발할때 121명이었으나 신체검사에서 20명이 떨어져 101명이 되었다. 숫자는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떠난 101명과 같은 숫자이다.(250) 또한 함남 성진의 양진섭 노인이 일제 무단통치를 피해 만주로 갈때 떠난 가족이 12가족 72명이었다. 구약의 야곱이 애굽으로 갈때 식솔 72명을 이끌고  들어갔다. 스스로도 자신의 이동을 입애굽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정착한 곳을 은혜가 충만한 동네 장은평이라고 불렀다.(263) 이러한 이해는 단지 숫자적 유사성이 아니다. 곳곳에 나타나는 성경구절처럼 저자는 한의 역사속에서 구원의 손길과 역사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셋째 장점은 한국이라는 땅이 좁다드니 아스팔트뿐이라느니 하던 시각을 벗고 땅이 말하는 것을 듣게 한다는 것이다. 강화도는 단지 놀러가기 좋은 동네로만, 해병대가 주둔한 곳 정도로만 알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발견하는 것은 강화도라는 이름이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사의 중심에 강화도가 있다는 것이다. 동네가 혹은 자로 돌림이름을 바꿈으로서 인생이 바뀌었음을 보여준 동네이고 또한 이때문에 항렬을 무시한 검은 옷을 좋아하는 , 검은개라는 별명을 얻은 곳이고 헌금중 날헌금(Day offering)이라 하여 시간을 드린 첫지역이라는 것과 의병활동과 이로 인한 순국자 순교자가 나온 곳이라 것을 듣게 된다. 강화도가 그렇게 멋진 땅인줄 몰랐다.


넷째는  처음 교회 신앙 동기가 애국애족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강화읍교회 권사 김동수 등은 의병활동을 도운 본보기로 재판없이 부둣가에서 살해된다. 이천에서도 전직관료이자 의병장 출신인 구연영 전도사와 아들은 역시 재판없이 장터에서 살해된다. 일본헌병대 문서에 따르면 경성동편 십여 군에 구연영만 없으면 기독교도 없을 것이고 배일자도 없어질 것이다”(214)라는 기록이 있다. 놀라운 사실은 이들의 순교후 사람들은 기독교는 애국애족하는 종교라고 보았고 강화도에서만 5천명의 입교인이 늘었다는 것이다. 도끼상소사건도 승동교회 청년부들이 목을 걸고 상소하였고 105인사건도 80% 기독교인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의 성장 이후에 대한 안타까운 이야기도 함께 들어가 있다.

기독교의 성장은 기댈 없고 호소할 없던 사람들이 소망을 가질 있는 유일한 곳이었고 애국애족하고 사회적 종교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종교적 전도때문만으로 성장한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동강 이양선의 통역과 안내를 맡았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나 로드암허스트를 타고 서해안에 나타난 모리슨 선교사의 선교실패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말한다. 물론 아무 항로도 개항도 하지 않은 위험한 땅에 올길이 상선을 이용하는 밖에는 없었지만 만일 이러한 제국주의의 군대와 이양선을 통해기독교가 들어왔다면 지금과 같은 기독교일지는 확신할 없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또한 유명한 1909년에 있었던 백만명구령운동의 실패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지적을 담는다. 한국교회의 놀라운 성장속도를 보고 선교사들은 백만명구령운동을 계획한다. 속도면 가능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단지 7천명이 늘었을뿐인다. 이유는 분명하다. 기독교가 가진 힘을 잊어버리고 종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백만구령운동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잘못되면 대단한 정치적 세력과 분출구가 될까 저어한 것이다. 선교사들이 보낸 글에는 이에 대해 조선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에너지가 정치적 폭발로 전개되는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해 백만명구령운동을 추진했다 안도시켰다. 덕분에 많은 민족주의자들이 이탈하였다. 선교사중에는 스크랜튼같은 민중선교사도 있었고 매켄지처럼 동네사람들과 같이 기거하다 죽은 이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치적 입장이 아닌 자기 나라의 정치적 입장이 의식 무의식적으로 더 크게 작용한 사람도 있는 것이다.

기독교가 성장한 것은 단지 교리가 좋다거나 혁명적이기었다거나 부자나라의 종교여서가 아니였다. 망해가는 나라에 독립의 희망을, 부패의 나라에 정직과 회개를 말했기 때문이다. 책은한국교회성장과 민족과의 관계에 대해 백년전 사건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백페이지정도의 긴 책같지만 한번 들면 쉬이 놓을 수 없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2006년 출판이지만 2008년 기준으로 벌써 7쇄이다. 교회에 대해 한번 제대로 보고 싶은 분 혹은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소문에 눈이 아프고 좀더 객관적 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은 읽어보길 강추한다- 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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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주 지음 | 홍성사 펴냄
한국 교회 1세대의 순전한 믿음, 처음 신앙을 찾아서! 성경으로 풀어 읽는 한국 초대교회사! 읽는 대로 배운 대로,...백만명 구령운동의 성령 바람을 일으켰던 신앙 선조들의 열정과 한국 교회 성장과정을 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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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큰바보

딸이 지은 시 한편

2009/05/02 21:22

미국도 메이데이를 합니다
이곳에서는 친환경의 날로 보내고 있습니다.
자랑스럽게도 딸이 오늘 행사에서 시를 낭독했답니다.
후일 이곳을 볼 딸을 위해서 또 딸자랑하는 푼수 아빠답게 올립니다.

Earth

Earth you gave me clean air

but I gave you dirty dusty air.

Earth you gave me green grass

but I gave you dirty brown grass.

Earth you gave me beautiful trees

but I have chopped down the beautiful trees.

Earth you gave me road

but I gave you a dump.

Earth I wish people could save tree and water.

It will be wonderful if we stopped pollu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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