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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묵상]망해야 정의다.

분류없음 | 2011/10/26 19:16
Posted by 큰바보

살아가기 위해서 직업을 갖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은 소원한다. 내 직업이 더 잘되고 영원하기를, 그리고 돈 많이 벌고 싶어한다. 그게 성공이다. 자기 직업이 잘될수록 성공인 것이다. 좋은 학교를 가려는 이유도, 좋은 직장을 가지려는 것도, 연봉이 높아지려는 것도, 몸값이 비싸게 되려는 것도 모두 성공하기 위해서이다. 인생의 수많은 과정들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반대로 이야기한다. 망해야 한다고 말한다. 믿음의 언어로는 내려놓음, 자기부인이라 하고 경제용어로는 망하는 것이다. 그걸 의롭다하고 정의라고 한다.

 

영어선생을 생각해보자.

영어를 나름 열심히 했고 투자했다. 그래서  토익 토플점수도 괜찮고 생활영어도 곧 잘한다. 이제 본전을 뽑아야겠지. 한국의 교육열이 뜨거울수록 영어의 필요가 높아질수록 영어과외 학원 그리고 자신의 토익점수의 활용도는 높아질 것이다. 곧 자신의 연봉이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고생하는 고교생들 재수생들을 보면 달라진다. 거국적인 면에서 이러한 엉뚱한 과열된 영어교육은 교육제도의 붕괴를 뜻하고 눈먼 돈과 시스템의 낭비이다. 영어를 지금처럼 공부해서 과연 어디다 써먹을까? 평생에 몇번이나 영어를 사용할일이 있을까? 더군다나 공부하는 방법도 문제다. 책상에 앉아서는 영어를 배울 수 없다. 문법이 틀리고 이상해도 그냥 말하고 무족건 말하고 외쳐야 영어가 되는거다. 또 영어를 써먹을 사람은 실재 많지 않다. 온국민 모두가 외국 말을 그렇게 열심히 해야할 이유가 없다. 직접 해당되는 사람들만 직접 외국에 가서 배우고 익히면 되는거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온국민이 영어를 사투리처럼 쓰게 하려고 한다. 그래야 성공처럼 말하고 그 레벨은 토익점수가 증명한다. 이런 교육은 교육제도의 실패와 사회인프라와 시스템의 낭비이다. 또한 사회교육의 빈곤과 철학의 빈곤이다. 예절과 존중을 모른체 얄팍한 지식을 전부인양 강조하고 자랑하고 반대로 모르는 사람은 무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학벌사회 학위사회를 만든다.

 

양심적인 영어선생에겐 이런 사회현상은 고통일 것이다. 삐뚤어진 교육제도의 혜택을 보고 그 위에 직업과 성공을 추구하게 되면서 고민을 하게 된다. 사회의 비효율성과 중고생등의 고통과 시스템의 낭비위에서 이익을 보아야하는가를 묻게 된다. 과연 이기적으로 나만을 위해서 살것인가? 아니면 이 구조를 바꿔야하는가? 그럼 나의 직업은 어떻게 해야하나?

 

하나 더 다른 예를 생각해보자.

의사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거치는지를 묻는 것은 불필요한 일이다. 웬만한 집의 부모들 모두 자식들이 존경받고 성공하길 바라고 의사는 이런 경우의 대표이다. 의사되기 위한 노력은 단지 의대를 거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우수한 고교내신과 입학성적이 필요하고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한다. 이러한 십여년의 기간을 거쳐서 의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선택받은 의사는 그때부터 고생한만큼 버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더 많은 연봉과 존경받아 마땅한 사회적 지위를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의사가 잘될수록 좋을까? 아니다. 좋은 의료기기가 개발되고 많은 의사가 나오고 병원이 많아지는 것은 좋은게 아니다. 그만큼 아픈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의사는 병때문에 살아가는 직업이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불행때문에 산다는거다. 의사는 그걸 알아야 한다. 자기 직업은 망해야 좋다는 것을. 자신이 잘될수록 안 좋은거다. 그렇다고 의사를 때려치자. 혹은 의사가 없게 하자? 그건 아니다. 의사는 더욱 절실하다. 그만큼 아픈 사람이 많고 더 많아진다는 것은 우리 현실이다. 다만 알아야한다. 의사가 치열한 경쟁을 치루고 이룬 자기의 업적 사회상류층에 속할 기회를 얻은게 아니라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먹고 살아가는 자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것이다.

 

우리는 자기 직업이 잘되길 바란다. 그래서 돈을 더벌고 부자가 되고 성공하고 또 더 많이 벌고…

하지만 그 와중에 얼마나 많은 다른 이들의 아픔위에자신의성공이 세워지는지를 잊곤한다. 우리의 성공과 압도적 연봉은 다른 사람의 불행위에서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좋은 의사는 모두가 건강해서 자기의 직업이 망하기를 바랄때 좋은 의사이다.

좋은 교사는 국영수 과외가 필요없고 국영수 중심교사가 필요없어서 아이들이 학교를 즐길수 있게 바꾸는 교사가 좋은 교사이다.

음악을 누구나 배우고 일반화되어서 자신이 점점 헐값이 되길 꿈꾸는 음악가가 좋은 음악가이다.

좋은 군인은 평화를 만들어서 군인이 실직되는 꿈을 꾸는게  좋은 군인이다.

좋은 정치가는  이해다툼이 없고 지도력이 필요없어서 정치가가 망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좋은 정치인이다.

좋은 목사란  죄인들이 없고 영혼이 병든 이들이 없어서 자신이 망하는 것을 꿈꾸는 목사가 좋은 목사다

 

보통 사람은 자기 직업에 그냥 충실하다. 한 평생 살면서 직업에 성공하고 돈 남보다 더 잘 벌고 번듯한 집살 수 있으면 성공이라고 말한다. 자기 직업직장이 잘 되길 바라는게 보통 사람들이다. 하지만 의로운 사람, 위대한 사람은 자기 직업이 필요없도록 세상을 만들어가는 사람이다. 의사가 망하고 정치가가 적어지고 군인이 실직하고 목사가 없어도 되는 사회를 꿈꾸면 좋겠다. 예수님도 십자가까지 달리실 필요없이 사람들이 회개했었다면 하고 바라시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현실이란게 그런가보다. 결국 예수님이 죽기까지 했을만큼이나 되어야 우리는 늦게사 깨닫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고집불통이고 바뀌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결국 남을 죽이지 자신이 죽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앞으로도 직업들은 더 잘될 거다. 자기는 결코 죽지 않을거다.  -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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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묵상] 왜 1도 2도 아닌 3인가

분류없음 | 2011/10/21 14:49
Posted by 큰바보

삼위일체 교리는 애증의 대상이 되곤한다

교회사에서 삼위일체교리는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자리잡았다 ...  고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중요하다고 알고 있다. 때문에 이 논쟁을 둘러싸고 이단과 정통이 만들어졌고 기독교의 중심교리로서 여긴다.

 

하지만 과거에는 정말 중요했는지 모르지만 실재현장, 목회현장, 교회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드물다. 교리교육할때를 빼고서는. 왜냐하면 설명하기 힘들고 그럴듯한 설명이 있어도 거의 모두 양태론이라는 이단시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말이 그 말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즉 잘해도 모덜리즘이라는 이단이 되거나 못하면 뭔지도 모르고 설명하는 바보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챤들이 삼위일체를 단지 신비 혹은 하나님의 본체에 대한 이야기로 구석에 몰아놓고 점점 추상화 형이상학화시키며 우리로부터 멀리 떨어트려놓는다. 중요하긴한데 그냥 금고에 넣어두고 그냥 보관만하고 있는 귀중한 서류처럼 대한달까? 그래서 혹자는 "삼위일체를 이해하고자 할수록 그 교리는 너를 궁지로 몰고 파괴할것이다"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결국 결단있는 사람은 삼위일체를 이상한 말놀이로 평가하고 머리속에서 제하거나 혹은 믿음으로 그냥 받아들이고 "세 위격이나 한본체이신 하나님"으로 외우고만다.

 

이런 현상은 삼위일체 신앙이 등장할 수 밖에 없었던 내적성장과 고민을 간과한 결과이다. 치열했던 전쟁이 지나고 나니 남는 것은 기념탑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삼위일체교리가 가진 깊이와 실재성 역사성사회성은 사라지고 말만 남은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중 삼위일체신앙을 간과하는 사람은 드물다. 몰트만이 일으킨 삼위일체교리의 부흥기를 거치면서 여성신학 해방신학 등에서 그 의미와 힘을 재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크리스챤의 삶과 실천에 있어 가장 실질적이고 변화를 이끄는 중요한 교리이다.

 

삼위일체 신앙은 우리 신앙의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하필 삼3인가?  일도 아니고 이도 아닌 왜 하필 삼인가? 아니 삼이어야 했는가?

그것은 삼이 자신들의 신앙을 이야기하기 때문이었다.

삼위일체신앙에 비해 일신론은 쉽다. 유대교처럼 이슬람처럼 오직 한 신 최고의 신을 상정하고 믿는 신앙은 이해와 실천이 쉽다. 반대로 다신론도 쉽다. 삶에서 많은 종교적 체험과 확장된 타문화 종교의 체험이 다신론이 조화와 사회질서뿐만 아니라 이해에 있어서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일신론이라면 유대교와 이슬람교와 형제교가 맞을 것이다. 또 그랬다면 바울이 그렇게 열심히 유대교와 차별을 두고 해명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고 죽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다신론이었다면 헬라 기독교인들이 핍박받지도 않았을 것이고 로마교인들도 순교의 피를 적게 흘렸을지도 모른다.

왜 하필 삼위라고 할까? 설명하기 어려운 숫자 3인가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게 기독교의 신앙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부터 가졌던 어려움은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유태교에 기반했지만 유대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믿는 하나님이 다르지도 않고 그렇다면 어떻게 유태교와 다르고 왜 따로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있어야 했다. 이것은 단지 종교적 차이가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의 신학과 삶이 어떻게 유대전통과 다르고 어떻게 새로운 시작을 해야하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이라 하겠다. 기독교 전통은 일신론 전통으로부터 가해진 핍박속에서 차이를 발견할 수 밖에 없었고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의 전통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했다. 이후 2세기이후에는 다민족문화전통을 접하면서 수많은 신앙전통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해명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이러한 신학적 고민과 묵상이 삼위일체교리를 가능하게 하였다.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고 하지만 신약에서 핍박속에서 이러한 자기성찰과 규명은 계속 등장한다

초대교회신앙인들은 발견한 것이다. 자신들의 신앙은 유대교의 일신론과도 다르고 헬라의 다신교와도 다르다는 것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하나님, 내안에 임재하신 성령님을 체험하며 타종교신앙과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자기의 정체성을 발견하면서 그게 가진 중요성을 발견한 것이다.

 

둘째, 삼위일체 신앙은 신앙의 체험에서 나왔다.

그냥 어느날 만들어진 이론적 해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앙의 체험들이 삼위되신 한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주론 본질적 실체에 대한 체험은 창조신앙과 자연적 삶의 공포와 위대함을 체험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믿게 된다. 하지만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바로 인간의 타락의 문제를 해결하신 것이 성자 예수님인 것이다. 십자가의 사건은 너무나 강렬해서 유독 독특하게 기독교는 죽음을 전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십자가사건의 체험은 기독교인을 기독교인되게 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과거의 사건으로 종결되지 않고 지금의 사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공간적으로 말한다면 외부의 초월절 성부, 우리와 함께 계신 성자,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이라고 할 수 있고 시간적으로 말하면 창세전의 성부, 역사의 현장가운데서의 성자, 그리고 성자이후의 미래에서 역동하시는 성령이라고 하겠다. 구속사적 사건중심으로 보면 이 순서도 바뀐다. 십자가의 성자, 십자가를 내속에서 일으키는 성령, 그리고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게 하시는 성부.(삼위에는 순서가 없고 우선순위가 없다.)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단지 외부의 시공간의 초월적 본질로만 본게 아니라 역사속에, 고난의 현장속에, 삶속에 그리고 우리마음안에까지 역사하시는 분으로 본다는 것이다. 헬라의 신론이 거대한 올림푸스산위의 존재론적 신들로서 끝남으로서 우리공동체가운데,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교 역시 그렇다. 초월적 하나님은 있으나 우리가운데까지 오셔서 고난당하신 신론은 가능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카발라 전통등에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전통, 셰키나 신학이 생겨난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삼위일체의 신앙은 우주와 자연, 역사, 인간 그리고 본질적 내면까지 해명하고 변화시키는 내적 성찰의 이야기인 동시에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속에서 체험한 놀라운 하나님 이야기를 전하는 외적통찰인 것이다.

삼위일체신앙은 붕뜬 이야기가 아니다.  논리로 설명하고 정통이단을 따진 교회사로만 봐서도 안된다. 왜 등장하였고 어떤 신앙적 결과가 파워가 변혁이 있었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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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배우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어떤 사람이 너의 배우자이면 좋겠는가?"

대부분 말하길  "먼저 믿음좋은 사람이어야 해요"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먼저 마음은 착해야 하고 외모는 180정도에 매력이 있는 모습이면 좋겠고 직장은 장래가 총망되고 부자는 아니어도 월수입은 우리 식구가 먹고 살고 간혹 놀러갈 정도면 좋겠어요."

….

가볍게 구체적으로 말하지만 거의 조건이면 엄친아아닌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종종 정확히 모르는 때가 많다.

 

우리는 바라는 목사의 모습도 종종 원칙과 소망과 현실이 엉켜서 오해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슈퍼맨 목사이다. 설교는 당연히 잘하고 찬양인도도 잘하고 기타나 드럼도 칠줄 알고 성가대지휘도 할줄 알아야하며 상담기술도 있어야하고 당회나 교회를 아무 무리없이 이끌고 어른들에게 잘하고 야외에서는 체육대회사회도 잘보고 여전도회야유회때는 레크레이션도 재미있게하고 운전도 잘해야하고 체력은 헐크같아서 새벽기도부터 밤성경공부까지 있어야 하고 귀는 커서 성도들의 문제나 요구를 애매하게 말해도 재깍재깍 알아들어야 하고 리더쉽에 있어서는 스티븐 잡스처럼 창조적이지만 교회의 오랜 전통을 해치지 않아야 하고 강력하게 이끌지만 독재가 되지 말아야 하고 모든 성도의 요구를 듣지만 우유부단하지 않아야 한다. 사례비는 적게 받지만 일은 교회청소와 전기수리까지 만능이어야한다. 이건 목회슈퍼맨이다.  그리고 목사들도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무척이나 애를 쓴다. 나도 이런 정도의 목회자가 된다면 좋겠다.  이런 목회자가 되면 좋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위의 모습이 성도가 바라는 목회자라면 하나님이 바라는 목회자는 어떤 모습일까 하는 것이다.

 

종종 목사를 하나님의 종으로 자기 정체성을 규정한다. ""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사람이 종인 것이다.  하지만 용어는 종종 너무나 오해를 만들고 부작용을 야기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너무 특권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폐해는 이미 여러가지로 드러났고 소문을 만들었다. 부언이 필요없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미지로 목사의 모습을 그려본다. 예수님이라는 목자곁에 있는 목동견의 모습으로서이다. 목동견으로서의 목사 이미지가 ''이라는 말때문에 뉘앙스가 이상하지만 중요한 통찰들을 던져주고 있어서 사용하겠다.

 

1.목동견은  누구를 위해서 일하는가?

종종 너무나 자주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우리는 '' 어떤 종류의 종인지는 묻지만 누구의 종인지는 망각하곤 한다. 그래서 종종 (사람의 혹은 교회조직의) 종으로 오해한다. 사람의 종이 아니다. 목사나 성도나 양자 모두 잘못 사용한다.  목사가 취임식의 말로 성도를 '섬기겠다' 말한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하나님을 믿는 것과 이웃사랑이 별개가 아니기에 맞다. 하지만 틀리다. 종종 목사는 성도의 눈치를 보고 할말을 못하고 꾸짖지를 못하고 성도는 목사의 섬김을 당연하게 여기고 얼마나 목사가 자신들보다 낮은지를 사역평가의 중요한 기준처럼여기기도 한다.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결과이자 자연스런 현상이지 그게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종이지 사람의 종이 아니다.

 

2.목동견의 고용주는 누구인가?

이런 현상은 목사를 '고용'하는 교회에서 두드러진다. 목사 전도사를 골라서 입맛에 맞는데로 자신들의 헌금으로 고용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당회에 보이려고 애쓰기도 한다. 비록 과정이 사람에게 보이고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요구에 따라 그에 알맞은 사람이 선택되지만 그것은 일자리의 고용과정이 아니다. 고백하듯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과정인 것이다. 목동견은 누가 고용하는가? 양들이 고용하는가? 아니면 목자가 고용하는가? 목자다. 목사의 고용자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목사의 고용자이고 목사는 당회의 압박이나 눈치가 일차가 아니라 하나님의 눈치가 가장 우선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더불어 물을 있는 질문은 "목동견의 임금은 누가 주는가? " 역시 목자이다. 목사가 목동견으로서 일할때 사례비가 적을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목사들은 세금내고 싶다. 대부분의 경우 교회가 워낙 작고 어려워서 사역자들의 월급이 일반 직장인 수준되는 곳이 별로 없다. 나도 군장교로 일할때 받은 중위월급이 내인생 가장 월급이었다. 하지만 목사는 교회에 불평하지 마라. 그건 목사가 잘못 가르쳐서 그런 것이고 하나님께 요청할 일이지 양들에게요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목자가 목동견의 먹이는 책임진다.

 

3.목동견은 양들에게 친절하지 않다.

목자를 섬기는 목동견의 임무는 무엇인가? 양들을 보호하고 이끄는 것이다. 과정에서 양들에게 좋게만 말할 없다. 종종 짖어대고 물을 수도 있다. 양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목사가 성도를 섬기는 것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짖는 것이다. 인간적인 관계로 혹은 사업을 도와주는 형태로 도울 없다. 그것은 잘하는 이들에게 맞기면 된다. 목동견이 있는 일은 양이 깨어나도록 정신차리도록 양의 우리로 들어가도록 크게 짖어주고 이끌어주는 것이다. 그걸 잘하는 목동견이 좋은 목동견이다. 

종종 목동견이 양들에게 둘러쌓여 목자의 눈치보다 양들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목동견이 양들 수백마리에게 둘러쌓였다고 양눈치보며 짖지 못할까? 그런  목동견은 목자의 눈을 벗어나고 더이상 목동견의 일을 없다. 견은 견다워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양도 살고 목동견도 살고 목장도 산다. 그러지 못할때 늑대 등의 공격에서 양들을 잃을 뿐인 것이다.

 

4.목동견은 양을 잡아먹지 않는다. 목자가 주는 것을 먹는다

종종 목동견이 양을 잡아먹는 경우가 있다. 한평생 목회를 잘하고서는 마지막 은퇴비나 차량 사택등의 문제로 양이 시험에 들고 죽는다. 목동견이 바라는 것은 양을 키워서 양에게서 털을 받고 고기를 먹는게 아니다. 그것은 목자의 것이다. 목동견이 바랄 것은 목자가 주는 것을 받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양이 손댈 있는 것이다.

 

 

우리 시대에 목사는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CEO같은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목사는 목사다워져야한다는 것이다. 경건하며 영적이고 땅에 두발을 디딘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목사는 사람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다. 일하는 사람이다. 목동견처럼 열심히 뛰어다니며 짖어대야한다. 그렇게 목자를 보필할때 목동견은 목동견다운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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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ad Sea Scrolls, Archaeological Museum , Amman
The Dead Sea Scrolls, Archaeological Museum , Amman by Lightmash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1952
사해문서로 알려진 문서들이 발견된 동굴 세번째에서 이상한 것이 출토되었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판이었다. Copper Scroll 알려진 보물지도의 시작이다. 발견 당시 너무 녹이 슬어서 운반할 없어서 23판으로 나눠서 운반되어졌고 복구 즉시 번역되었다. 그만큼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보물들이었다. 모두  63곳의 장소가 언급되었고 몇몇은 즉시 그곳들을 방문했다.
   하지만
기대감도 컸지만 안타깝게도 실재 장소에서는 발견된 보물들이 없었다. 이미 가져갔을수도 있고 23판으로 나눠진것 자체가 음모일지도 모르겠고 혹은 속에 어떤 코드들이 있을수도 있다.

 

보물지도는 보물찾기의 핵심이다.  복잡한 암호와 수수께끼가 가득하고 하나 하나를 풀고 역경을 헤쳐나가면 나중에 엑스표시가 있는 지점에 도착해서 보물을 캐내는 것이 하나의 낭만같이 보인다.  와중에 보물지도는 아주 비밀중 비밀이 된다. 그것이 드러낸 메세지나 장소를 따라가야 목적을 이룰 수있는 것이다. 그래서 음모와 다툼은 지도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보물지도를
비밀이라는 관점에서 보자. 지도는 비밀이다. 자체로 비밀이고 안에 비밀이 들어있다. 무제는 비밀이 드러난 뒤에도 비밀이냐는 것이다.  일단 비밀을 따라 작업을 해서 보물을 파냈다면 보물지도는 여전히 보물지도냐는 것이다. 일단 성공이든 실패든 한번 거친 다음에는 보물지도의 가치는 사라져 버린다. 그냥 지도가 되고 만다. 이상 소중히 보관할 필요없다. 그냥 액자에 넣어서 벽에 걸어놔도 것이다. 아무 소용없는 낙서에 불과하다. 한번의 효용밖에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 비밀을 보여주고 기록한 책이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를 믿고 실천한다. 안에는 하나님의 나라의 계시가 있고 행복한 삶의 비밀이 들어있고 구원받은 자의 삶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소위 특별계시로 분류되어 믿어진다. "특별"이란 일반계시와 구별되어 애매모호한 말이 아니라 역사속에서 인간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록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이고 비밀들이라면 문제는 성경은 여전히 계시이고 비밀일 있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이미 밝혔다. 몇천년전 구약을 통해서 2천년전 신약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하나님나라에 대해 삶의 고통과 행복에 대해 우리의 미래에 대해서 밝히 글로 알렸다.  계시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명약관하하게 책으로 글로 지워지지 않게 성서유니온을 통해서 넘쳐나게 많은 책으로 공짜로 계시했는데, 이후에도 안에 알아야 것들이 아직도 모르는 것들이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계시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것들이 있느냐는 것이다. 이미 예수천당 불신지옥, 사영리, 신학, 수많은 신앙서적 등으로 계시를 밝혔는데 안에 계시가 이상 있을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모두가 아는데 무슨 비밀이 있을까?

 

예전 영화 "식스 센스" 나왔을때 가장 미운 놈이 극장에서 뒤에 앉아서 " 사람 이미 죽은거래" 라고 떠들어서 김빼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이미 알려지면 김빠지고 설익고 재미없고 긴장감없고… 이미 기능상실이다. 보물이 이미 드러났는데  더이상 "보물"지도가 "보물"지도일까? 그냥 "지도"일까?  성경의 계시를 비밀을 이미 글자로 말로 설교로 밝혔다면 성경은 여전히 비밀일까? 계시일까?

 

성경을 오성으로 접근할 지식 혹은 책으로 이해하는 ,  계시가 글자안에 있다고 생각하는한, 성경을 과학책으로 다운그레이드 이해하는 , 성경을  한번 사용하고 끝날 일회용으로 생각하는 , 성경을 역사책처럼 정보의 집합처로 생각하는 한… 성경은 그냥 책으로 끝난다. 정보지식사전에 불과해진다. 이런 관점에서는 성경은 성경은 종결되었다고 하겠다. 더이상의 정보지식은 필요없다. 불가능하다고 할수 있다. 계시의 완전성이랄까!. 하지만 이건 성경을 완전한 계시로 보는게 아니라 완전히 끝난 책으로 보물지도가 아닌 지도로, 스포일러로 이미 줄거리를 알고 재미와 스릴을 상실한 영화보듯이, 녹차 재탕 삼탕해서 흐려진 끝물 억지로 마시듯이, 성경을 끝장내는 이해이다.

그렇다고 성경은 계속 씌어진다? 이것도 옳지 않다. 그것은 계시를 양적으로 이해해버리는 것이다. 계시는 정보처럼 갈수록 업데이트되는게 아니다.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충분히 비밀이 담겨있지만 끝나지 않을 뿐이다.

 

성경은 오늘의 사건이다.

성경은 아직도 비밀이다.

말했으나 아직도 말할 것이 있고

우리는 들었으나 아직도 들어야 것이 있고

알고 있으나 아직도 모른다는 것이고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고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갖지는 않았다는 것이고

오래전 주어졌지만 아직도 항상 새롭다는 것이 바로 "계시"이다.

이것을 오픈 시크릿이라고 부르자 혹은 공개된 비밀. 혹은 누구나 아는 비밀이랄까

성경의 계시는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비밀들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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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문답  3-   계시란 무엇인가?
 
뉴스와 진부함의 위험

 


스티브 잡스가 죽었다
그래서 띠띠띠 -- 9시뉴스에서 "오늘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방송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했다. 곳곳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꽃다발이 넘쳤다
다음 뉴스에서 다시 "어제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라고 방송한다.
 
날도 사람들은 명복을 빌었다.
 
다음날 뉴스에서 다시 "3일전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뉴스에서 "일주일전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한달 "한달전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매일 매일 그리고 6개월 지난 후에도 "6개월전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일년뒤"일년전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습니다."

….

이렇게 매일매일 동일한 뉴스를 방송하면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처음에는 조의를 표하고 관심갖다가도 매일 매일 일주일 한달 두달 석달 일년 매번 9시뉴스 첫기사로 나온다면 사람들은 아마 엄청나게 짜증을 부릴 것이다.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그의 뉴스는 뉴스가 아니라는 것이다.뉴스는new-s  새로운 것이어야 하는데 전혀 새롭지가 않다.Old-s라고 불러야 맞을지도 모른다.

이젠 진부하고 새롭지도 않다. 흥미를 일으킬수도 없고 알고싶지도 않다. 누구나 알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 십자가의 소식을 우리는 복음 뉴스라고 부른다.  "2천년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받았다." 야호

"2천년하고 하루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받았다." 야호

다음 날도  "2천년하고 이틀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받았다."

다음날 "2천년하고 삼일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받았다."

3개월후에도 매일 "2천년하고 석달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그래서 우리는 죄사함받았다."

1년뒤에도 매일매일 "2천년하고 1년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라고 한다면

 ...

계속 동일한 이야기를 할수록 어떻게 될까?

점점 복음이 아니라 지루한 진부한 뉴스가 것이다. 뉴스가 아니라 boring old-s 이다.  복음,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는 죄사함받았습니다라는 것이 교리로 굳어지고 뉴스처럼 읽어진다면 매번 동일하게 매주 동일하게 설교될수록 뉴스는 Good news 대신 bad 뉴스 바뀐다.

 

뉴스는 남이 모르는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누구나 안다. 예수영화도 많고 성경책도 많고 이제는 교회도 많이 다녀서 성경의 이야기들은 누구나 안다. 누구나 아는 예수님 이야기를 전하면 새로운 뉴스가 될까? 2천년전에도 뉴스였고 2백년전 한국에 왔을때도 새로운 뉴스였고 어제도 오늘도 한결같이 뉴스일까?

현재 우리가 당면한 기독교의 문제는 여기에 있다.

복음이 복음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죄사함을 이야기하지만 이미 아는 소식인데 그것을 주일마다 매일 반복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시간낭비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심지어 전할수록 진부화의 효과만 강화되어서 멀어진다

 길거리에 노점이 있으면 많은 사람이 보고간다. 신기한 물건들이 많고 저렴해서 사두면 좋을 때도 많기 때문이다. 노점상때문에 길거리 막힌다고 욕하는 사람은 많지않다. 먹고 살아야하는 상황도 알고 신기한 물건들도 가끔 나오기때문에 눈이 머문다. 하지만 여기에 길거리 노방전도를 하면 다르다.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피해간다. 짜증낸다. 귀찮아한다. ? 이미 아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다. 새롭지가 않다. 정보가 없다. 이미 죽은 정보다. 누구나 알기 때문에. 문제를 넘어가지 못하면 우리가 열심히 전할수록 더욱 진부화만 가속될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과 막닥뜨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스를 항상 새로운 ""스로 전할 것인가? 단지 체험만 강조하는게 아니라 신학적인 철학적인 성경적인 주장이 있는가? 우리는 스스로 ''스를 새로운 ''스로 인식할 있는가? 질문에 대해 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부화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교회의 고민은 전도가 적다는게 문제가 아니라 복음에 대한 근본적으로질문이기때문이다.

 

 

 

-생각해보고 스스로 답해보자. 1분동안.

 

 

 

 

 

 

 

어허1 생각하자니까 밑에를 아직 읽지말자

 

 

 

 

 

 

 

 

 

 

-30 남았다.

 

 

 

 

 

 

 

 

 

질문은 계시에 대한 질문이다. 계시란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뉴스가 New스가 되지 못하는 것은 계시를 정보나 지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이다.  계시를 정보와 구분지어야 한다. 정보란 일회용이다. 한번 말해주면 그것으로서 가치를 다한다. 하지만 계시는 일회용이 아니다. 한번 말했다고 그 가치가 사라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계시를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로 나눈다. 맞는 분류이다. 하지만 분류를 지식과 정보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일반계시는 하나님이 자연과 이성과 문화전통 등의 방법을 통해서 이미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특별계시는 성경과 교회를 통하여서 계시를 완전하게 증거하였다는 것이다.  두가지 분류는 선명하게 구분짓기에 좋지만 함정이 있다. 계시의 수용자에 대한 문제와 지식의 소유적 관점의 문제이다.

계시의 수용측의 문제란 일반계시든 특별계시든 수용자가 눈감으면 아무 차이가없다는 것이다. 특별계시여도 듣지 않으면 계시가 아니다. 일반계시보다 못하다. 일반계시더라도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과 신성을 발견하며 오히려 특별계시보다 분명하게 하나님을 발견하게 있다는 것이다. 실재로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과 얼굴을 맞대고 설교를 듣고 배웠지만 배반하고 죽이려는 계획을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에겐 특별계시는 전혀 특별하지도 않았고 계시로 들리지도 않았다. 교회론등의 차원에서 특별/일반을 나눌수는 있지만 수용자가 받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는 구별일 뿐이다.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하기도 곤란해진다. 그냥 정보에 불과해진다.

두번째는 계시의 소유적관점이다. 이는 계시를 듣고 '알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계시는 이중 삼중의 방화벽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 소유할 있는게 아니다. 왜냐하면 계시는 하나님"" 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 이해하는 아니기 때문이다.주체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체로서 행하는 것이지 우리가 접근하는게 아니다.이해와 지식으로 접근하면 계시는 소유가 되고 더이상의 목소리를 들을 없는 것이다. 계시를 정보로서 접근하는 것은 계시가 아닌 종교지식을 얻을 뿐인 것이다.특별계시이든 일반계시이든 계시를 정보지식적 소유가능한 형태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우리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눌 있는 것도 아니다.


    계시를 굳이 이해라고 억지 말한다면 비슷한
유형이 사랑이다고 할 수 있다.

부부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은 누구나 안다. 이미 공개된 지식이다. 사람이 결혼식을 했고 같이 잠도 자고 직업은 무엇이고 사는 곳은 어디이고 처가,친가가 어떤 집이고…기타 등등을 모두가 있다. 페이스북이나 싸이를 하면 거의 모든 정보를 얻을 있다. 지식은 소유가능하다. 누구나 있다

하지만  부부가 나눈 사랑은 다르다. 누구도 모른다. 사람만이 안다. 부부만이 안다. 남들도 그들이 사랑한다고 "알"지만 남들은 그 사랑을 "알"지 못한다. 남들이 부부를 아는 같지만 실상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싸우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자식을 안고 행복해하고화를 내고…이런 내용은 알지 못한다. 누구도 공유할 없다. 알아도 안게 아니다. 부부의 비밀은 소유가능하지가 않다. 사람이 섹스하는 사이라는 것은 국민이 안다. 그러지 않다면 병원을 가야한다. 하지만 안다해서 안다할 있나? 아니다. 사랑하기에 갖는 몸짓이 갖는 내용은 누구나 아는게 아니다. 사람만이 안다 그 깊이와 넓이와 아픔과 기쁨을.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 두사람 빼고.

계시란 이런 지식과 유사하다. 모두가 알지만 누구나 아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알게되는 것이다.

부부처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관계없이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고 십자가에 달리셨고 우리 죄를 씻으셨고 구원받았다'라는 것은 정보 지식일 수 있다.  속에 계시의 관계가 들어가지 못하면 항상 진부한 소음의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선조들은 체험적 신앙이란 말을 했다. 체험  몸으로 느끼는 신앙 하나님과의 관계없이는 알수 없다는 것이다. 기도를 강조하면서 직접 기도해보지 않으면 기도의 깊은 곳으로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 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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